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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이미지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상설전시

동아시아 7년 전쟁(1592~1598) ‘임진왜란’ 특화전시실 임진왜란실

임진왜란을 다시 보다
조선, 명, 일본의 7년 전쟁

전시실에 오시면 3면 대형 화면을 통해 생생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부 조선, 명, 일본의 7년 전쟁 임진왜란의 경과

1부는 일본의 조선 침략, 조선의 반격, 명군의 참전으로 인한 동아시아 대전으로의 확대,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 일본의 재침략(정유재란), 그리고 종전으로 이어지는 임진왜란의 전개과정을 보여줍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였다.
7년 동안 이어진 참혹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豐臣秀吉 肖像
Portrait of Toyotomi Hideyoshi, Mastermind of the Invasions of Joseon Dynasty
일본 오사카시립미술관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1600년

1600년에 그려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이다.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알려졌으나, 이 그림에서는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죽은 후 에도시대 초기까지 다이묘나 절・신사에서 그의 초상을 많이 제작하여
주로 예배용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징비록
징비록 懲毖錄
Jingbirok, Written by Ryu Seongryo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Joseon Dynasty
조선 후기

류성룡이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懲毖”는 의도에서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7년간의 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군무와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류성룡은 이 책에서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모두 침략한 동아시아 전쟁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징비록은 근세 일본인들에게 임진왜란을 알려 주는 주요한 사료로 인식되어 많이 인용되었다.

선무공신 권응수

임진왜란 때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권응수(權應銖, 1546~1608)장군은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하는 등
커다란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Joseon Dynasty
권응수 초상
권응수 초상 權應銖 將軍 肖像
Portrait of General Gwon Eungsu
개인 소장자 기탁
보물
조선 후기

이 초상화는 17세기 공신 초상화의 양식이지만 이 시기의 호랑이 흉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옷 주름의 강한 음영 등으로 보아 후대의 이모본임을 알 수 있다.

권응수 유품 칼
권응수 유품 칼 權應銖 遺品 刀
Sword taken from General Gwon Eungsu
개인 소장자 기탁
보물
조선, 16세기

권응수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에게서 빼앗은 칼이다. 칼의 손잡이에는 일본도임을 알려주는 일본의 연호 ‘대영원년(大永元年, 1521)’이 새겨져 있다. 칼날은 그대로 사용하고 칼집은 조선의 양식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평양성 전투도 平壤城 戰鬪圖
Painting of the Battle of Pyongyangseong Fortress between the Japanese and the Joseon-Ming Alliance in 1593
조선 후기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군은 왼쪽 끝에 5명이 그려져 있다. 평양성 안에는 성을 점령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고를 받는 모습과 일본군들이 명군을 향해 조총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두르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명군은 이여송李如松, 양원楊元, 장세작張世爵 등의 장수를 앞세우고 말을 타며 활기차게 나아가고 있다. 또한 화포부대를 이끌었다고 알려진 낙상지駱尙志는 한 손에 화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일본군을 매달고 가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1
  •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2
  •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3
  •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4
  • 조·명 연합군이 1593년 1월 일본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5
정유재란 개전 명령서 丁酉再亂 開戰 命令書
Toyotomi’s Order to Reinvade Joseon Dynasty
일본 사가현립나고야성박물관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1597년

1597년 2월 도요토미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면서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하달한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일본군을 부대별로 배치하고, 조선에 쌓아놓은 왜성에 각 다이묘를 배치하라는 명령이 들어 있다. 또한 전라도를 남김없이 철저히 공략하고 군사 행동이 끝난 후에는 거점성을 지을 장소를 논의할 것을 당부하며 기필코 명까지 공략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풍신수길주인장 1
  • 풍신수길주인장 1
  • 풍신수길주인장 2
  • 풍신수길주인장 3
  • 마귀 초상
    마귀 초상 麻貴 肖像
    Portrait of Ma Gui, the Ming General who Participated in the Siege of Ulsan During the Jeongyu War
    개인 소장자 기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9호
    조선, 19세기

    정유재란 때 명에서 파견한 장수 마귀(麻貴, 1541~1612)의 초상이다. 호피가 깔린 의자 위에 금관조복을 입고 홀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금관조복은 왕이 제사 지낼 때 백관이 입는 관복이다. 보통의 금관조복과는 달리 깃 주위나 단을 연속된 국화무늬로 채웠고 붉은 옷은 어깨에 걸쳐 있다. 붉은 선으로 우락부락하게 얼굴을 그렸고, 위로 향한 눈썹, 2개씩 있는 눈동자, 붉은 입술 등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청·홍·녹색 등 원색을 사용하고 관과 의자에는 금칠을 하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명장名將의 모습을 무신도로 그려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 상도 그러한 용도로 보인다. 마귀는 상곡 마씨上谷 馬氏의 시조이다.

  • 류성룡 갑주(복원품)
    류성룡 갑주(복원품) 柳星龍 甲冑(復原品)
    Armor and Helmet Weared by Ryu Seongryong(Reproduction)
    보물
    복원 2018년
    원품: 조선, 16세기

    류성룡이 전쟁 당시에 입었던 갑옷과 투구를 복원하였다. 갑옷 일부가 전해져 그 형태와 재질을 짐작할 수 있다. 돼지가죽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만든 미늘을 사슴가죽 끈으로 엮어서 제작한 비늘 갑옷札甲이다. 투구는 챙이 있는 원뿔 모양으로 쇠비늘을 엮어 만든 볼가리개와 뒷가리개가 연결되어 있다.

  • 마씨종택철검
    합천 송림리 마씨종택 철검 陜川 松林里 麻氏宗宅 鐵劍
    Iron Sword Used by Ma Shunshang, a Descendent of Ma Gui
    개인 소장자 기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46호
    명, 16세기

    중국 명에서 만들어진 마귀의 증손 마순상麻舜裳의 칼로 알려져 있다. 마순상은 1627년 명나라 등주의 군량을 감독하다가 배로 군량미를 조달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에 정착하여 살았다.

정왜기공도병 征倭紀功圖屛
Painting of Ming Forces Defeating Japanese Forces during Japanese Reinvasions of Joseon Dynasty
에도시대, 19세기

정유재란 당시 명군이 일본군을 정벌한 공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의 후반부이다. 전반부는 스웨덴 극동아시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천 왜성 전투, 노량 해전, 남해도 소탕전 등에서 일본군을 정벌하고 한양으로 개선한 명군의 환영 연회, 북경 자금성에서 명 황제에게 전쟁의 승리를 보고하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원래는 중국에서 제작되었으나 화면의 금채, 윤곽선을 통한 산의 표현, 인물 비례 등으로 볼 때 19세기 일본에서 모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왜기공도병 1
  • 정왜기공도병 1
  • 정왜기공도병 2
  • 정왜기공도병 3
  • 정왜기공도병 4
  • 정왜기공도병 5
  • 정왜기공도병 6
  • 정왜기공도병 7
  • 정왜기공도병 8
  • 정왜기공도병 9
  • 정왜기공도병 10
2부 더 멀리,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조선, 명, 일본의 무기

2부는 조선, 명, 일본의 무기를 비교 전시합니다. 활과 화살류, 창과 검, 타격기, 갑옷과 투구, 화약무기를 종류별로 소개합니다. 모두 보물로 지정된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중완구, 대완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형 화약무기는 도입으로부터, 지향 사격, 조준 사격, 조총 제작으로 변화 발전하는 기술의 단계를 유물을 통해 보여 줍니다.

승자통총
승자총통 勝字銃筒
The Seungja-Chongtong

승자총통은 1575년(선조 8)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역임한 김지金墀가 개발하였다. 기존의 총통보다 긴 총신을 이용해 사정거리를 개선한 휴대용 화약 무기이다. 『화포식언해』에는 승자총통으로 탄환과 화살을 발사하였다고 하였다.

더 멀리, 더 빨리, 더 정확하게 화약무기의 발달
조선의 대표 무기
  • 만력기묘명 승자총통
    만력기묘명 승자총통 萬曆己卯銘勝字銃筒
    The Oldest Remaining Seungja-Chongtong
    보물
    조선, 1579년

    승자총통 가운데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총통이다. 병부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만력 기묘년(1579년, 선조 12)에 규가揆加라는 장인이 만든 총통임을 알 수 있다. 승자총통은 1575년(선조 8)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역임한 김지金墀가 개발하였다. 기존의 총통보다 긴 총신을 이용해 사정거리를 개선한 휴대용 화약 무기이다. 『화포식언해』에는 승자총통으로 탄환과 화살을 발사하였다고 하였다.

  • 천자총통
    천자총통 天字銃筒
    Cheonja-Chongtong, the First Largest Cannon
    보물
    조선, 1555년

    조선시대 대형 화포의 크기는 천자문의 순서인 천(天)•지(地)•현(玄)•황(黃)에 따라 구별하였다. 그 가운데 천자총통은 크기가 가장 커서 대장군전 같은 대형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다. 1635년 간행된 『화포식언해』에 의하면 화약이 30냥, 격목이 7촌, 56근3냥의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면 900보를 날아간다고 하였다. 손잡이 2개는 모두 파손되었으나 제작연대(1555년)가 명확한 현존 최고最古의 천자총통이다.

  • 중완구
    중완구 中碗口
    Joongwangu, Medium Mortar Shooting Thunderclap Bomb Shell or Stone Cannonball
    보물
    조선, 1590년

    비격진천뢰나 단석 등의 탄환을 쏘는 화포이다. 크기에 따라 대・중・소・소소로 구별된다. 이 중완구는 상주포尙州浦에서 주조하였다는 명문이 있고, 출토지는 경상남도 하동군이다.

  • 현자총통
    현자총통 玄字銃筒
    Hyeonja-Chongtong, the Third Largest Cannon
    보물
    조선, 1596년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다음 크기의 총통이다. 『선조실록』 선조 33년(1600) 4월 4일자에는 “전투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현자총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포식언해』에는 현자총통에는 화약이 4냥 들어가며, 차대전 화살을 쏠 경우 800보를 날아가고 철환은 100개를 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현자총통은 1984년 경남 거제군 고현만에서 발견되었다.

  • 황자총통
    황자총통 黃字銃筒
    Hwangja-Chongtong, the Fourth Largest Cannon
    보물
    조선, 1587년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 가운데 크기가 가장 작다. 『화포식언해』에는 화약이 3냥 들어가며, 피령차중전(皮翎次中箭)을 쏠 경우 1100보를 날아가고, 철환은 40개를 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대형 화포들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배에 장착되어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 지자총통
    지자총통 地字銃筒
    Jija-Chongtong, the Second Largest Cannoni
    보물
    조선, 1557년

    천자총통 보다 작은 크기의 총통으로 대형화기 가운데 전쟁터에서 활용도가 높았다. 『화포식언해』에 지자총통에는 화약이 20냥 들어가고, 격목은 6촌, 29근8냥의 장군전을 쏠 경우 800보를 갈 수 있고 철환 200개를 쏠 수 있다고 하였다. 손잡이 2개는 모두 파손되었으나 전통적인 총통 구조를 계승하여 총구, 격목통, 약통의 구조를 갖추었고 약통과 격목통 경계에는 2개의 마디가 겹쳐 있다.

  • 비격진천뢰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Bigeokjincheolloe, Thunderclap Bomb Shell
    조선, 16세기

    비격진천뢰는 선조 때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어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다는 무쇠로 만든 포탄이다. 측면 화약 구멍을 통해 화약을 채우고 심지에 불을 붙인 후 주로 손으로 던지거나 굴리기도 하고, 주로 완구에 넣어 발사하였다. 도화선의 수에 따라 폭발 시간을 조절하여 시한폭탄 역할을 하였다. 박진朴晋이 1592년(선조 25)에 경주성을 수복할 때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무찔렀다. 이 비격진천뢰는 창녕 화왕산성에서 출토되었다.

  • 두정갑
    두정갑 頭頂甲
    Armor
    조선

    실전에서 입었던 장수의 두정갑이다. 두정갑은 두루마기 옷 안에 철이나 가죽으로 만든 미늘을 쇠못으로 박아 만든 갑옷이다. 겉면에는 쇠못의 머리만 보여 두정갑頭頂甲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갑옷이 만들어졌다. 류성룡의 갑옷과 같이 일정한 크기로 자른 미늘을 엮어 만든 미늘갑옷札甲, 면을 겹쳐 만든 면갑綿甲, 얇은 금속 조각을 물고기 비늘처럼 붙여 만든 어린갑魚鱗甲 등이 있다.

  • 월도
    월도 月刀
    Woldo, a Crescent-shaped Sword
    조선 후기

    초승달 모양의 칼날을 부착하여 월도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 명明의 기병이 월도를 사용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 것을 본 이후 조선에 도입되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월도는 주로 의장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평양성 전투도>에 말을 타고 월도를 휘두르는 명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 김명윤 쌍검
    김명윤 쌍검 金命胤 雙劍
    Two Swords Bestowed on Kim Myeongyun by King Seonjo
    개인 소장자 기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3호
    조선, 17세기 초

    임진왜란 때 파주목사로 큰 공을 세운 김명윤(金明胤, 1565~1609)에게 선조가 직접 내려준 검이다. 두 자루 모두 양날이 있으며 검의 등쪽에 가지가 나와 있다. 이 가지가 어떤 용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실용적인 용도보다는 위엄을 나타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 차폭
    차폭 車輻
    Chapok, Ceremonial Baton
    조선

    국왕을 호위하는 군사들이 갖고 다니는 의장용 철퇴의 일종이다. 손잡이가 있고 머리 부분이 참외 모양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모양이 수레바퀴살과 비슷하다고 하여 차폭이라고 불렀다. 『국조오례의 서례』「병기도설」 차폭조에는 “황동에 여덟 모[八棱]를 새겨 머리를 만들고, 나무를 사용하여 자루를 만들며, 아래 끝에는 쇠로 덮어씌운다.”라고 하였다. 『국조오례의 서례』에서 언급된 차폭대로 만들어졌다.

  • 철질려
    철질려 鐵蒺藜
    Caltrop with Four Sharp Spikes
    조선

    4개의 뾰족한 날이 달린 철 조각이다. 능철(菱鐵), 여철(藜鐵), 마름쇠라고도 한다. 적의 예상 진입로에 뿌려 놓아 적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사용하였다. 능철이라고도 한다. 철질려의 날에 똥물이나 독약을 섞어 놓기도 하고, 5~6개를 줄에 함께 묶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명의 대표 무기
  • 칠성쌍검
    칠성쌍검 七星雙劍
    A Pair of Qing Dynasty Swords with an Inscription of the Big Dipper
    경인미술관 소장
    청, 17~18세기

    당나라 때부터 전장에서는 외날의 도와 양날의 직검 중 실전무기로 ‘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럼에도 ‘검’은 장수나 무인들이 애용하던 병기로 명성을 유지했다. 그 중 쌍검은 중국 특유의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중국식 쌍검, 쌍도는 하나의 칼집에 두 자루의 칼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조선과 일본과는 전혀 다르다. 칼날의 단면은 삼각형이며 칼날에는 구리 재질의 칠성문이 교차되어 있다. 칠성문은 동양 삼국에서 칼날에 가장 선호하여 시문했던 벽사와 길상문양인데, 각 나라마다 입사 형태가 다른 특징이 있다.

  • 중도
    중도 中刀
    Sword of Ming Dynasty
    경인미술관 소장
    명, 17세기

    긴 칼은 주로 보병이 사용했고 기병은 월도나 협도 등의 장병기를 주무기로 사용했는데, 이때 기병은 도신이 짧은 칼을 보조 무기를 차는 경우가 많았다. 전신 갑주를 착용한 상태에서 긴 칼을 차는 것은 말을 탔을 때도, 장병기를 사용할 때도 불편하였다. 또한 민간에서 평복을 입을 때에도 간편함과 호신용으로 중도 크기의 가볍고 짧은 칼을 차곤 하였다.

  • 청룡언월도
    청룡언월도 靑龍偃月刀
    Green Dragon Crescent Blade
    경인미술관 소장
    명, 17세기

    명대의 언월도로 장식이 화려한 의장용이다. 『삼국지』의 관우가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한 청룡언월도는 그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 언월도의 형식이 전쟁 무기로서 정착한 시기는 중국 명나라 때이다. 월도는 칼날의 폭이 넓고 길며 휘어져 위압감을 주었지만, 실제 창처럼 찌르고, 휘두르며 베는 기능은 적을 살상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거워 충분한 용력과 기예를 갖춘 자를 제외하고는 능숙하게 사용하기 어려웠다. 후대에는 군대의 장중함을 보이는 의장용도로 전환되어 칼날도 얇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져 실전에서 잘 사용되지 않았다.

일본의 대표 무기
  • 조총
    조총 鳥銃
    Matchlock Musket
    경인미술관 소장
    에도시대, 18세기

    포르투갈의 무역선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화승총은 전국 시대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력 무기로 사용되었다. 일본의 화승총은 서양식에 비해 자루가 짧고 사격 시 뺨에 갖다 대는 자세로 발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갑옷을 입고 화승총을 사용할 때 어깨에 올려놓고 사격하는 것보다 뺨에 대는 방식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유효거리는 약 100미터 미만으로 활에 비해 짧았으나 갑옷을 뚫어 살상력이 강했다.

  • 오다치
    오다치 大太刀
    Ootachi, Long Battle Sword
    경인미술관 소장
    아즈치 모모야마시대, 16세기

    일본도는 칼날을 포함한 길이가 3척 내외 약 90~100㎝인 칼을 표준으로 하고, 그 보다 긴 칼은 130~150㎝의 오다치大太刀 또는 노다치野太刀라 하여 실전에서 사용하였다. 말의 다리를 벨 때 사용하여 참마도斬馬刀라 부르기도 하였다. 전장에서 길고 무거운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두렵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무로마치와 에도 초기까지 많이 사용하였으나 전국 통일 후 전쟁이 사라지고 총포 등의 무기가 발달하면서 전장 무기로서의 비중이 감소하여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 가기야리
    가기야리 鍵槍
    kagiyari, Spear with Lattice Iron
    경인미술관 소장
    에도시대, 17~18세기

    일본 전국 시대 후기에 등장한 무기로서 소창素槍 창날이 곧고 덧가지가 없는 창의 자루 아래 부분에 철제의 격자쇠를 별도로 장착한 창이다. 격자쇠는 한 쪽만 위로 세워진 편건片鍵, 양쪽 다 위로 세워진 양건兩鍵, 하나는 위, 하나는 아래로 세워진 십자문건十字紋鍵 또는 만건卍鍵 등 여러 유형이 있고 이 유물의 경우는 한쪽에만 격자쇠가 있는 편건에 속한다. 격자쇠로 상대의 무기를 받아내어 창이나 칼날을 제압할 수 있는 창으로서 길이는 짧았지만 전장에서 매우 선호되었던 실용적 무기였다.

3부 서적과 그림이 남긴 기록 주제별로 보는 임진왜란

3부는 기록물, 진주성 전투, 이순신과 수군, 논공행상, 문화 전파와 교류, 전쟁 후 동아시아와 조선 사회의 재편을 주제로 임진왜란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쇄미록
쇄미록 瑣尾錄
Swaemirok, Diary by O Huimun on His Life as a Refugee during the Imjin War
보물
조선, 1591~1601년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동안 쓴 일기이다. 개인의 일기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보고 들은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함, 피난민의 삶, 군대 징발과 군량 조달, 양반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상 등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 임진왜란의 또 다른 면들을 풍부하게 보여준다. 저자 오희문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으나 아들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이고, 손자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과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삼학사 가운데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이다.

김시민선무공신교서 金時敏 宣武功臣敎書
Royal Certificate of Meritorious Subject Issued to Kim Simin for His Contribution to Victory in the Jinju Battle of 1592
보물
조선, 1604년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이다. 김시민의 본관은 안동이고, 천안 출신이다.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되었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로 임명되어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 교서는 일제강점기 때 유출되었다가 2005년 경매시장 도록에 실려 그 존재가 국내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 소식이 2006년 진주에 알려지자 ‘진주문화사랑모임’을 중심으로 국내 반입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MBC 프로그램 ‘느낌표-위대한 문화유산’을 통해 국민모금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온 국민의 성원 속에 7월 25일 고국으로 돌아왔고 9월 22일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옮겨져서 지금에 이르렀다.

김시민선무공신교서
  • 김시민선무공신교서
논개 초상
논개 초상 論介肖像
Portrait of Nongae Painted by Yoon Yeohwan
진주성 의기사 기탁
2007년

윤여환이 그린 논개의 초상으로 2007년에 표준 영정으로 지정받았다. 김은호의 <논개상>이 작가의 친일논란과 복식의 고증 논란으로 인해 다시 제작된 것이다. 이전의 <논개상>이 일제강점기 이후 열녀 초상의 교과서가 된 김은호의 <춘향상>을 토대로 그려졌던 것에 반해, 이 초상은 16세기 여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을 고증하여 제작되었다.

  • 이충무공전서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 全書
    Chungmugong-Jeonseo, Collection of Writings by General Yi Sunshin, Posthumous title Chungmugong, which was Published on the Command of King Jeongjo
    조선 후기

    1795년(정조 19)에 왕명으로 이순신의 글과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여 유득공이 교정을 보고 윤행임이 편집 책임을 맡아 간행하였다. 정조는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순신과 송시열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충무공전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이순신이 쓴 시와 산문, 난중일기, 이순신에 대한 비문碑文, 제문祭文 등이 총 망라되어 있다. 또한 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 방어책을 건의한 것, 옥포해전 등 바다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 유황과 화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 조선인 포로와 일본인 포로의 정황을 보고한 것 등과 함께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후 왕에게 보고한 장계狀啓도 있다. 특히 이 전서에는 거북선龜船 그림과 크기가 실려 있어 거북선 연구와 이순신 및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 에혼 타이코기
    에혼 타이코기 繪本太閤記
    Ehon Taikoki, Japanese Novel on the Life of Toyotomi Hideyoshi and His Seven-Year War
    에도시대

    에혼 타이코기오카다 고쿠잔(岡田玉山, 1737~1812)이 글을 쓰고, 호쿄 고쿠잔法橋玉山이 그린 도요토미의 일대기와 임진왜란을 전체적으로 다룬 일본 고전 소설이다. 일본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인물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의 주요 전투 장면, 조선과 명의 장수들의 모습을 그림과 함께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에혼繪本’이란 이름이 붙었고 ‘타이코太閤’는 도요토미가 조카에게 관백직을 물려준 뒤 사용한 칭호이다. 이 책은 『징비록』 등 조선과 명의 사료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우월주의적 시각을 담고 있다.

수군조련도 水軍操鍊圖
Painting Depicting Joseon Naval Exercises
조선, 19세기

임진왜란 뒤 통영에서 행해진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합동조련을 그린 그림이다. 여기에 펼쳐진 진형陣形은 조선 후기 군사훈련 교범인 『병학통兵學通』에 나오는 삼도주사첩진도三道舟師疊陣圖와 일치한다. 삼남 수군의 편제는 5영營체계로, 각 영 밑에 5사司를 두고, 각 사 밑에 5초관哨官을 두었다. 이것은 지역별로 편대와 도별로 선단을 구성하여 명령이 있을 때는 지정된 해역으로 집결함과 동시에 기동선단을 형성할 수 있도록 사전에 임무와 위치가 결정되었다.

수군조련도
  • 수군조련도
조선통신사 행렬도 朝鮮通信使 行烈圖
Paintings of the Parade of Joseon Envoys who Went to Japan
조선 후기

통신사 일행이 일본의 에도성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이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07년 ‘회답 겸 쇄환사’가 파견되면서 재개되었다. 1811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이 행렬도의 맨 앞에 ‘한국사신입황성행진도(韓國使臣入皇城行進圖)’란 제목과 뒷 부분에 있는 배관기는 일제 강점기 때 쓴 것이다. 배관기에는 사이토 마고토(齋藤實), 김윤식, 이완용 등이 이 그림을 보고 느낌을 적은 시와 글이 있다. 이들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것을 합리화하고자 통신사를 통한 조선과 일본의 우호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1
  • 조선통신사 행렬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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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희마도 韓人戱馬圖
Painting of Joseon Envoys Performing Martial Arts on Horseback
모사 1919년
원품: 에도시대, 18세기

『조선인래빙기』를 그린 와타나베가 조선 통신사가 일본의 쇼군 앞에서 행한 마상재馬上才를 그린 그림이다. 마상재는 1636년 통신사 파견 때 처음 실시되었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사였다. 7종의 곡예로, 말 위에 서서 타는 마상립馬上立, 말의 옆으로 몸을 기울이는 좌우칠보左右七步, 말 위에 거꾸로 서는 마상도립馬上倒立, 말 위에서 엎드리는 마상앙와馬上仰臥, 등자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숨기는 등리장신鐙裏藏身, 상체를 뒤로 뒤집는 마상도타馬上倒拖, 말 두 마리 사이에 타는 쌍기마雙騎馬이다.

한인희마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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