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역사문화홀은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편안히 느껴보는 문화휴식공간입니다.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재와 각종 역사 도서, 휴식의 공간을
복합 구성하였습니다.
신석기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서부경남의 유물을 소개합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농경이 시작되었습니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각지에 마을을 이루어 정착하였고, 흙을 빚고 돌을 갈아 각종 도구와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토기를 만들어 삶을 영위하였습니다.
서부경남의 남해안 지역은 다양한 어패류와 해산물이 풍부하여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많은 유적이 형성되었습니다. 다도해 일대의 수 많은 패총유적이 이를 증명합니다. 최근에는 진주 평거동과 같은 내륙에서도 유적지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토기면에 점토띠를 덧붙여 문양효과를 준 것으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이다. 문양은 주로 아가리를 따라 수평으로 한 줄 혹은 여러 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표현되며, 거치문, 삼각집선, 평행사선 등의 문양을 넣기도 한다. 덧무늬토기는 부산 동삼동, 울주 신암리, 양양 오산리, 통영 연대도ㆍ욕지도, 여수 돌산 송도 유적 등 동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의 유적에서 확인된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이다. 넓은 의미로는 신석기시대 모든 토기를 지칭하며, 좁은 의미로는 선이나 점 등으로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한 토기를 가리킨다. 빗살무늬토기는 기면에 빗 같은 도구로 찍거나 그어서 만든 점, 선, 원 등의 무늬를 장식한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용도와 기능에 따라 발형, 옹형, 고배형, 접시형, 깔때기형, 귀때형 토기 등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발형토기는 음식을 끊이거나 보관 용도로, 목이 있는 항아리는 저장용으로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00~1000년에 시작됩니다. 빗살무늬토기문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토기와 석기가 등장하고 농경기술이 발달하면서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들어섭니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무덤 축조 전통을 정착시키고, 청동기라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기술로 만든 도구를 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시설을 갖춘 마을이 생겨나며, 마을 내부의 갈등을 조정하고 여러 마을을 통합할 수 있는 유력자나 집단도 등장하였습니다.
특히, 진주의 대평 유적에서는 대규모 농경지와 함께 환호 등의 방어시설, 석기ㆍ옥제품 등을 만드는 생산시설이 발굴됨에 따라 당시 한반도 남부의 중심 취락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다를 통한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지, 변한과 가야의 다채롭고 특색 있는 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에 따르면 삼한시대 한반도 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과 그에 속한 수십개의 소국이 있었는데, 서부경남에는 변한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2개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변한은 뛰어난 제철과 항해기술을 보유하고 낙랑•대방에서 일본 규슈지역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당시 한•중•일 동아시아 교류체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천늑도는 사천시 삼천포항과 남해군 창선도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섬전체에 대규모의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수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패총과 무덤, 주거지 등의 유구와 함께, 다양한 국적의 토기류(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토기, 한반도 점토대 토기 등)를 비롯하여, 중국의 화폐인 반량전, 오수전과 중국거울, 청동화살촉 등 약 13,000여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섬 전체에 가득찬 유적과 다국적의 유물들은 2000여 년 전 사천늑도가 고대 동아시아지역 문화의 중심·기착지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 낙동강 서쪽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나라입니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고성의 소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 등 여러 가야가 다양한 문화를 구가했습니다.
서부경남지역은 5세기경인 후기가야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가야의 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고성ㆍ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소가야는 남해안연안에 국제적인 해상 교역망을 형성하고 영호남 내륙을 연결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령을 중심으로 성립한 후기 가야연명체의 맹주인 대가야는 6세기 초 가야 북부와 호남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통괄하며 초기 고대국가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562년 멸망하였습니다.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통일신라와 고려의 화려하고 세련된 유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가야를 통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을 완성하고 삼국의 백성을 통합하였습니다. 통일된 신라는 이질적인 문화를 통합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이 시기 불교는 통일 국가를 이끄는 사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한국 불교 최고의 고승이라 불리는 원효와 의상 등을 배출하였습니다. 통일신라 초기에는 교종 중심이었으나 9세기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사회가 점차 혼란해지자 선불교가 전래되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었습니다.
서부경남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도 이 시기 불교와 관련된 유적과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해인사 묘길상탑,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비롯하여 창녕 말흘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말흘리 유적 출토품들은 대부분 구덩이 안 철솥안에 차곡차곡 포개져 출토되었다.
왜 이렇게 출토되었을까?
말흘리 유적이 절로 운영되었던 시기는 나말여초기로, 도적과 반란이 들끓던 혼란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귀중한 물품들이었던 사찰용품들은 구덩이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화왕산의 말흘리 유적은 통일신라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특히 1호 건물터
남서쪽 모서리의 구덩이 안에서 500여 점의 금동제품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불단을 장식하거나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사찰용품이었다. 100여 점의 화려한 금동장식판은 꽃모양을 비롯하여 오각형, 장방형,
원형 등 다양한 형태이다. 70여 점의 금동장식구와 128점의 금빛을 발하는 금속공예품들은 통일신라시대
말흘리유적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불법의 숭상을 강조하였듯이 고려시대에는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사람이 불교를 자신들의 믿음으로 삼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불교 행사가 거국적으로 치러졌습니다. 거란과 몽골 등이 침략하여 국가적 위기에 처했을 때도 불교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장경을 판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경남 지역에서도 진주 남성리 및 밀양 영원사지 출토 문화재, 하동 출토 청자 등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들을 통해 고려인의 세련된 미의식과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영암사는 가야산과 지리산의 중간지점에 있는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영암사라는 절 이름에 대한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탁본으로 전하는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1023년 건립)의 비문을 통하여 적연선사가 입적한 1014년(현종 5년) 이전에 이 절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밀양 영원사는 고려 충선왕의 왕사였던 보감국사寶鑑國師 혼구混丘(1251~1322)가 거처했던 사찰로 유명한데, 창건과 폐사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 영원사터에는 보감국사의 승탑과 부도, 석조불상, 귀부龜趺, 이수螭首 등이 남아 있다. 1963년 이곳에서 14세기에 제작된 청자와 청동사리합이 발견되었다. 청자는 매병 1점과 대접 2점, 접시 2점, 팔각접시 3점 등이며, 모두 상감기법으로 장식되었다. 엉성해진 그릇의 형태와 문양에서 퇴락해 가는 상감청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분청사기에서 왕실 도자기까지 조선의 도자기를 만나보세요
조선시대 분청사기 중에는 그것을 만든 도공이나 생산지, 사용 관청 등의 이름이나 공물 표시 등을 새긴 것이 있다. 사용 관청의 이름이나 공물 표시 등을 새긴 것이 있다. 사용 관청의 이름을 표시한 것은 그릇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도공이나 생산지의 이름을 새긴 것은 그릇 품질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특히 경상도 지역에는 생산지로 보이는 진주, 삼가, 밀양과 같은 지역 이름이 새겨진 분청사기가 많이 남아 있다.
중종의 아들이었던 덕양군(1524~1581)의 태를 담은 항아리와 그 기록(태지석)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항아리에 담고, 항아리 안에 이름과 생년월일이 기록된 태지석을 함께 묻었다. 이러한 행위는 '안태(安胎) 혹은 '장태((藏胎)'라고 불리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씨 앞날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고, 더 나아가 나라의 번영을 기원을 마음을 담은 조선왕실의 독특한 출산문화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