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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전시특별전 진주성 전투
- 기간2012-09-25 ~ 2012-12-02
- 장소기획전시실
- 주관국립진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진화수)은 임진왜란 7주갑(420년)을 맞아 진주성에서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던 ‘진주성전투’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오는 9월 25일(화)부터 12월 2일(일)까지 69일간 개최한다.
◦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벌어졌던 제1차 진주성전투(진주대첩)와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 벌어졌던 제2차 진주성전투를 조명하는 이번 특별전에서는 진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진주성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주요 전시자료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하였던 현자총통(보물 제885호), 김시민선무공신교서(보물 제1476호), 이광악 장검, 태평회맹도(보물 제668호), 진주성도 병풍, 쇄미록(보물 제1096호), 황진무과홍패(보물 제942호) 등이다.
◦ 현자총통 - 천자총통·지자총통에 이어 크기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중화기이다. 기록에 따르면 화약 4냥을 장약하여 차대전·차중전이나 철환 100개, 연환 30개를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가 800~1,500보(약 1.0~1.9km)에 이른다고 하였다.
◦ 김시민선무공신교서 -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이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 칭호로서, 1등에 이순신·권율·원균 등 3명, 2등에 김시민 등 5명, 3등에 이광악을 비롯한 10명 등 모두 18명이 이 칭호를 받았다. 진주대첩과 관련하여 김시민과 이광악이 각각 2등과 3등으로 책봉되었으며, 두 사람의 선무공신교서가 현재 모두 남아 있다.
◦ 이광악 장검 - 진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던 곤양군수 이광악이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장검이다.
◦ 태평회맹도 -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호성공신, 선무공신, 정난공신 및 임진왜란 이전에 책록된 광국공신과 평난공신 등이 모여 회맹을 여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회맹제를 시행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과 참여자들 63인의 명단이 있는데, 진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던 이광악도 이 회맹에 참가하여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 진주성도 병풍 :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진주성과 성안 읍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현재 내성은 정비·복원되어 있으나, 외성 부분은 진주 시가지로 변해 있어,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10폭 자리 병풍이 두 점 전시되었는데, 그중 한 점은 이번 특별전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 쇄미록 : 조선 중기의 문인 오희문의 피난 일기로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동안의 일기를 기록하였다. 책의 명칭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보잘것없이 떠도는 나그네’라는 뜻에서 취하여 ‘쇄미록’이라고 하였다. 전쟁 중의 피난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중요자료이다.
◦ 황진무과급제교지 : 제2차 진주성전투 당시 왜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황진 관련 고문서 가운데 하나로, 1576년 10월 황진이 무과 병과 16위로 합격한 후 받은 증서이다.
□ 1592년 10월 1차 진주성전투와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는 승리와 패배라는 명백한 결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호남의 안전을 둘러싸고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졌던 치열한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 진주성은 군량의 주요 보급지인 호남으로 향하는 경로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은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김시민을 진주목사로 승진시켜, 진주성 방어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 진주대첩 당시 진주성에는 3천 8백여 명의 조선군이 있었고, 진주성 외곽에 4~5천 명의 지원군이 있었다. 이에 반해 진주성을 공략하는 일본군의 병력은 약 2~3만 명이었다. 조선군이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이었지만, 김시민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6일 동안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큰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승리에는 성 외곽지역에서 진주성을 지원하였던 의령의 곽재우, 고성의 조응도, 전라좌도 임계영, 전라우도 최경회 등 지원군의 역할도 있었다.
◦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일본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던 이유는 우선 제1차 진주성전투(진주대첩)의 참패를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제1차 진주성전투와 마찬가지로 진주성이 지녔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확실한 승리가 필요하였던 일본군은 10만 명의 대군을 모아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천일을 비롯한 최경회, 황진 등은 진주성을 반드시 지킬 것을 결의하고, 3천여 의병이 진주성에 입성하였다.
◦ 제1차 진주성전투 때와는 달리 외부의 지원군이 없는 상태에서 관군과 의병,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황진·이종인 등은 전투 도중 전사하였고, 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은 패색이 짙어지자 남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주성 내에 있던 수만 명의 백성들은 일본군에게 도륙되거나 남강에 빠져 사망하였다. 의기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에 빠져 죽은 것도 제2차 진주성전투의 일이다.
◦ 임진왜란이 끝나자 국가적인 차원에서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에 참가한 이들에 대한 포상과 현창사업이 이어졌다. 국가에서는 충민사와 창렬사를 세워, 충민사에는 제1차 진주성전투 때 전사한 김시민 장군의 위패를, 창렬사에는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전사한 김천일·최경회·황진 등 31인의 위패를 모셨다. 진주성 경내에는 ‘김시민장군전공비’ 와 ‘촉석정충단비’를 세워 이들의 공적을 비석에 새겼다. 1997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세워졌다.
□ 1719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의 일원이었던 신유한은 일본인 수행원에게 임진왜란 때 진주사람들이 포로로 연행되어 와서 ‘진주도晋州島’라는 곳에 모여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해 놓았다.
□ 국립진주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임진왜란 7주갑(420년)을 맞아 진주성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가 관람객 모두에게 느껴지는 계기가 되길 기원한다.
□ 전시개요
◦ 전 시 명 : 임진왜란 7주갑(420년) 특별전 ‘진주성전투’
◦ 전시기간 : 2012. 9. 25(화) ~ 12. 2(일), 69일간
◦ 전시장소 :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실
◦ 전시자료 : ‘진주성도’ 등 8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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