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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진주박물관

진주박물관 관람시간
  • 09:00 - 18:00
  • 휴관

    매주 월요일
    매년 1월1일
    설·추석 당일

Jinju Museum

JINJU NATIONAL MUSEUM

전시

[화력조선 시네마] "정주성" 1811년 홍경래의 난 최후의 전투 - 제5부 : 땅울림

작성자국립진주박물관 등록일2024.03.18 조회수42

4월 19일. 관군은 정주성의 성벽을 무너뜨린 후 정주성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후 관군들의 무차별적인 참살(慘殺)이 시작됩니다. 총사령관이었던 유효원은 함부로 반군을 죽이지 말라고 명했지만, 병사들을 완벽히 제어하는 건 어려웠습니다. 기록에도 이 부분은 잘 나와 있습니다.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경계를 내려 엄하고 분명하게 단속하였는데도 오랫동안 쌓인 분에 격발 되어 군사들이 모두 손수 칼을 들고 베었으므로 자연히 살육한 숫자가 매우 많게 되었습니다. - 정주성 함락 직후의 장계, 『서정일기』 中 발췌 관군 지휘부가 통제하려고 했지만, 100여 일 넘게 이어진 공성전에 대한 병사들의 염증과 분노를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반군에 대한 분노는 이후 사로잡은 이들에 대한 처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관군은 정주성 내에서 사로잡은 2,983명 가운데 여자 842명과 10세 이하의 남자 224명을 제외한 1,917명을 처형합니다. 이전의 반란이나 민란의 경우 주모자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 달리 냉정하고 엄격한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