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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진주박물관

진주박물관 관람시간
  • 09:00 - 18:00
  • 휴관

    매주 월요일
    매년 1월1일
    설·추석 당일

Jinju Museum

JINJU NATIONAL MUSEUM

소식·참여

보도자료

대장군전, 420여 년만의 고국 나들이

작성자홍보담당 등록일2017.07.25 조회수1041

국립진주박물관(관장 최영창)은 7월 25일(화)부터 10월 22일(일)까지 상설전시실 1층에서 특별전 <정유재란 1597>을 개최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를 맞아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비롯하여 정유재란 관련 문화재 150여 점(보물 10건 15점 포함)이 출품된다. 학술교류협정기관인 일본 나고야성박물관의 협조로 7건 10점의 일본 문화재도 소개된다. 이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일본 수군 장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1542-1600)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관해 온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대장군전大將軍箭이다.

 

임진왜란특성화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국립진주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정유재란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시도한다. 전쟁 당시 주요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전쟁의 전모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종전 이후 조선·명·일본 동아시아 삼국에 전란이 끼친 영향을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전시는 크게 5부로 구성된다.

 

1부는 ‘정유재란 이전 강화협상과 조선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1593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시작된 때부터 강화협상이 결렬될 때까지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다룬다. 이 코너에서는 평양성전투도 병풍, 명 병부상서 석성 초상石星肖像, 류성룡柳成龍이 받은 교지, 윤두수 초상尹斗壽肖像, 황신 초상黃愼肖像 등이 소개된다.

 

2부는 ‘전쟁의 재개와 일본군의 공세’라는 주제로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남원성, 황석산성, 전주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공격하는 시기를 다룬다. 이 코너에서는 일본군의 공격명령서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인장朱印狀, 황석산성전투에 관한 기록이 적힌 『고대일록孤臺日錄』, 남원성전투에서 사용된 화살촉과 마름쇠 등이 전시된다.

 

3부는 ‘조명연합군의 반격과 주요 전투’라는 주제로 조명연합군이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세를 꺾은 뒤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를 다룬다. 조선 수군의 재건 과정을 보여주는『임란첩보서목壬亂捷報書目』, 명량 출토 소소승자총통 등의 문화재를 통해 조선 수군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일본군의 시각에서 본 울산성전투도 병풍(복제품)과 명군의 시각으로 본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병풍을 통해 당시 주요 전투의 실상을 보여준다.

 

4부는 ‘전쟁의 기억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전쟁이 남긴 유산을 생각하는 코너이다. 여기서는 『징비록』(국보 제132호), 『쇄미록鎖尾錄』(보물 제1096호), 『금계일기錦溪日記』(보물 제311호) 등 기록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조명하며, 마귀麻貴·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등 명군과 일본군 장수의 초상을 함께 전시한다.

 

5부는 ‘종전 이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라는 주제로 전쟁이 끝난 뒤 조선·명·일본 삼국의 변화를 소개한다. 이 코너에서는 이순신선무공신교서李舜臣宣武功臣敎書, 포로송환문서, 조선통신사행렬도,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 등을 통해 전쟁 이후 삼국의 인식 변화를 살펴본다.

 

또 일본과의 전쟁으로 남아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조선의 산성과 왜성倭城에 대한 영상 등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정유재란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갖도록 하고자 하였다.

 

아무쪼록 이번 전시가 정유재란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16세기 조선에서 일어난 동아시아 국제전쟁이 갖는 현재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420여 년 만에 돌아온 조선의 대장군전大將軍箭

 

이번 특별전에 최초로 국내에 공개되는 대장군전大將軍箭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수군 장수였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수집하여 본국에 가져간 뒤 그 후손들이 대대로 보관해 온 것이다. 현재 이 문화재는 일본 사가현 가라쓰시唐津市에 기탁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대장군전으로는 실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재이다. 이 대장군전은 원 소유주인 구키 다카쿠니九鬼隆訓씨(일본 도쿄도 거주, 구키 요시타카의 후손)가 한일우호를 위해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에 출품을 허락하여 전시하게 되었다.

대장군전은 목재로 만들어진 화살 몸통 부분의 길이가 182cm이며 굵기는 최대 지름 9.4cm, 둘레 33cm, 무게 10.6kg 정도이다. 머리 부분에 철촉을 박았는데, 현재 철촉은 사라지고 없다. 1963년 서울 군기시軍器寺 터에서 발견된 대장군전의 철촉이 10cm 정도, 무게 4.5kg인 것을 감안하면, 원래 전체 길이는 192cm, 무게 15.1kg 정도로 추정된다.

 

화살 몸통 중간 부분에 ‘加里浦 上 金等 造’라는 해서체楷書體로 쓰여진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가리포는 오늘날 전라도 완도에 설치된 수군 첨절제사진僉節制使鎭이 있던 장소로 전라우수영 관할이었다. 이 명문에 의하면, 가리포 첨절제사진 소속의 장인 김아무개 등이 제조하여 진상한 것이다.

 

이 대장군전은 1966년 10월 28일 일본 가라쓰성 천수각 개관 당시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후 수장고에 격납되어 묻혀 있었다. 이번 국립진주박물관 특별전 <정유재란 1597>을 계기로 새롭게 조명되는 중요문화재이다.

 

 

 

 

<전문가 의견>

 

김일환(순천향대 인문학진흥원 연구교수)

 

19세기 편찬된『융원필비』 등 조선후기 군사기술서적에 기록된 총통전의 전체 길이나 지름을 고려하면 대장군전인지 장군전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전선이나 각종 무기체계가 대형화되는 것을 고려하면, 19세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장군전으로 볼 것이 아니라 대장군전으로 보아야 한다.

 

대장군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1474년에 편찬한《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군례軍禮〉병기도설兵器圖說에 있는 대전大箭은 약 190cm 정도였다. 임진왜란기 일본인의 종군기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도 대장군전이 5척이라 하여 약 150cm 정도의 크기였음을 말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을 기준으로 보면, 대장군전이 길이는 190cm 정도였고 조선후기로 가면서 크기가 커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상진(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대장군전의 재질은 가시나무Evergreen oak이다. 가시나무는 우리나라 남해안에서 섬 지방, 제주도를 거쳐 일본 혼슈 남부와 중국 남부의 따뜻한 지방에 자라는 수종으로 단단하고 강인하여 예로부터 쓰임이 넓었다. 단위무게(비중)가 0.83 전후로 0.5 전후인 소나무보다 훨씬 튼튼하다. 가시나무의 옛 이름은 가서목哥舒木, 가사목加斜木, 가세목加世木 등으로 불렸으며, 이년목二年木도 가시나무를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년목은『융원필비戎垣必備』등에 대장군전의 제작 목재로 기록되어 있다.

 

 

히사노 데쓰야久野哲矢(일본 나고야성박물관 학예원)

 

대장군전은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1542-1600)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온 것이다. 구키 요시타카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제도 방면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안골포, 웅천 등지에서 조선 수군과 전투를 하였다. 구키 가문의 가전기록家傳記錄에 의하면, 이 대장군전은 1593년 6월 부산해전에서 획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부산에서 대규모 해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입수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군이 발사하여 일본군에게 피해를 주었을 무기를 일본으로 가져가고 이를 400년이 넘도록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문의 보물로 표기될 정도로 중요해진 것은 1633년 구키 가문이 막부의 명령으로 해안의 미에현三重県에서 내륙의 효고현兵庫縣과 교토부京都府로 영지를 옮긴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대장군전은 구키 가문이 전쟁에서 획득한 물건이라는 의미 외에 바다에 근거한 수군이었다는 가문의 역사를 상징하는 물건으로 중요하였기에 양호한 상태로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1542-1600) 소개

 

구마노熊野 해적 출신으로 구마노 해적의 세력이 약화된 후 오다 노부나가의 수군 장수로 활약하며 많은 전공을 세워 이세伊勢, 시마志摩 3만 5천 석의 영주가 된다. 오다가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수군 조직의 중핵을 맡으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수군 총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전쟁 초기에는 주로 육지에서 활동했고 이순신의 활약이 두드러지자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수군 9천여 명을 이끌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일본 수군을 구원하려고 출동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한다. 쓰시마對馬島에서 군선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니혼마루日本丸라는 거대한 장갑함을 만들었다. 그뒤 일본으로 돌아가 현역에서 은퇴하고 지내다가 1600년 히데요시 측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 사이에 벌어진 세키가하라전투에서 히데요시 측인 서군에 가담하였다가 패하였다. 이 때 친아들인 모리다카守隆가 이에야스 측인 동군에 가담하여 부자가 서로 적이 되어 싸우는 비극을 맞았다. 모리다카는 이에야스에게 자기가 세운 전공의 대가로 아버지의 구명救命을 청하여 그 허락을 받았으나 그 소식이 도달하기 전에 자살하였다(출전: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pp.217-218).

 

붙임: 특별전 ‘정유재란 1597’ 포스터, 주요유물사진, 설명패널